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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은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장식했던 정치 깡패를 대표하는 실존했던 인물로, 드라마 무풍지대와 야인시대를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요, 그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을 BEST 3로 정리했습니다.

 

KTV에서 제공한 유지광 공판 당시 사진
유지광 공판 모습(출처: KTV)

 

1. 유지광의 생애와 이정재와의 관계

 

 

먼저 <유지광>의 생애와 그의 보스인 이정재와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유지광은 1927년에 태어나서 1988년 11월 12일까지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고, 공부를 곧 잘해 단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950년 대학 재학 도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갑종장교로 임관하여 참전한 후 육군 중위로 전역하였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한 청년단체에 가입하면서 정치와 폭력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단국대를 3학년에 중퇴한 그는 28세이던 1955년 당시 동대문파의 두목 이정재의 권유로 <삼우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주먹 세계에 뛰어들었고 행동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두목 이정재는 같은 이천 출신이면서 유지광의 형과 이정재의 고모가 결혼했기 때문에 유지광과 이정재는 서로 사돈관계였습니다. 조직 내부에서의 서열은 이정재가 위였고, 나이도 이정재가 10살이나 많았지만 고모부의 동생으로 항렬이 높아 유지광을 하대하지 않고 사돈이라고 존칭을 해주었습니다.

 

동대문 사단 시절 유지광 사진
동대문 사단 시절 유지광

 

이후 유지광은 이정재의 든든한 후배이자 마음을 터놓는 심복으로 활동했는데요, 대학교 학력과 장교 경력을 가진 그는 당시 조직폭력배에서는 보기 드문 엘리트 출신이었으며, 이정재와 동대문 사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주먹으로 대접받았습니다.

 

 

2. 유지광의 전성기와 몰락

 

다음은 유지광의 전성기와 몰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지광은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 당시 <동대문 조직 두목 이정재>,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렸습니다.

 

동대문 사단 2인자 임화수 사진
동대문 사단 2인자 임화수

 

 

그의 전성기는 30세였던 1957년 5월 25일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를 성토하기 위해 야당이 주최한 장충단공원 시국광련회에서 연단 책상을 부수고 마이크와 앰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등 강연장을 아수라장을 만드는 테러를 자행한 여당의 정치 테러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은 주동자로 유지광 등을 조사하였으나 그 배후 관계는 규명하지 못하고 그의 12월 30일 유지광만을 재물손괴죄 등으로 구속 기소한 채 수사를 종결하였다. 유지광은 이 사건으로 징역 8개월을 살고 출소합니다. 출소 후 감옥에서 읽었던  신라 화랑도 관련 책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이 주도하는 청년단체인 <화랑동지회>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회원으로 가입한 자들에게 이정재의 직인이 찍힌 회원증을 발급하였고, 이정재의 명성에 힘입어 수많은 주먹들이 가입해 회원이 천여 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33세인 1960년 4월 18일에 고대생 습격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3.15 자유당 부정선거에 항의하면서 시위에 나섭니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지시를 받아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부하 60명을 이끌고 고대생과 충돌합니다. 고대생은 이철승 의원의 설득으로 해산 중이었으나, 이를 모르는 유지광은 고대생을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학생들의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리면서 4.19 의거가 일어났고, 이승만 정권 몰락 후 그는 고대생 진압사건 등의 죄목으로 1960년에 체포됩니다. 이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형을 이어가던 중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정권이 그를 포함한 동대문 사단을 다시 재조사합니다. 이때 이정재의 부하였던 임화수는 이정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으나, 유지광은 모든 행위가 자신이 한 행위라고 진술하며 두목 이정재와 직속 부하들을 살리고 본인 혼자 사형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재판장에서 진술하는 유지광(가운데), 왼쪽은 임화수, 우측은 이정재

 

 

재판 결과 그를 포함한 이정재, 임학수, 박영주, 신정식 등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후 유지광만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훗날 그도 자신이 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 무기징역에서 다시 15년형으로 감형을 받았으며, 결국 5년 6개월 후 다시 감형되어 1965년 말에 석방되었습니다.

 

3. 출소 후 삶과 죽음

 

 

다음은 유지광의 출소 후 삶과 죽음입니다.

 

그는 출소 후 <대지 영화사>라는 이름으로 1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자리를 잡은 듯했으나, 제2의 임화수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47세인 1974년 가족들을 이끄고 고향인 이천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식당, 농장, 지하수 개발, 건축공사, 양주 판매업 등의 사업을 하였으나 변변치 않았습니다. 54세인 1981년에는 고향 이천에 있으면서 이정재의 묘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983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정재를 호칭할 때는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고, 화랑동지회를 처음 조직할 때 깡패들이 뭉쳐 뭔가 유익한 일을 해보겠다고 모였다며 당시 모인 깡패들이 거리 청소를 하는 등 새마을 운동의 효시가 되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힘이 전부라고 믿었던 과거가 부끄럽고 그 같은 인생관이 얼마나 허망된 것인지 4.19 의거가 가르쳐 주었다고 했습니다.

출소 후 후배들을 관리하면서 그들의 결혼식 주례를 자주 맡았는데요, 1988년 11월 12일 한 후배의 결혼식 주례를 보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졌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61세였습니다. 생전 슬하에 3녀를 두었으며, <대명>이라는 자서전을 썼는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내용도 있지만 미화하는 내용이 많아 출간 당시에는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를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 <무풍지대>가 큰 인기를 끌자 원작 <대명>을 <무풍지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한국, 대만, 일본의 조폭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당시 돈으로 1억 원 가까운 조의금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유지광 자서전 대명 이미지
유지광 자서전 <대명>

 

 

그에 대한 자세한 인물정보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바로가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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